천간지지(天干地支)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현재처럼 기상과학이 발달하기 전, 고대인들은 농업생산과 기후 여건의 연관성으로 바람과 비, 구름 등이 순조롭기를 무척 크게 기대 했을 것이다. “중국은 세계에서 최초로 농업이 발달한 나라 중의 한 나라 였고, 당연히 사계절의 변화에 관련된 천문에 관심을 갖고 천문과 관련된 점복을 행하게 되었으며, 이때 거북의 등껍질이나 짐승의 뼈에 글자를 새겨 복사를 하였다.” 갑골문에 새겨진 “복사(卜辭)의 내용도 많은 부분이 바람과 비나 맑고 흐림에 대한 점복(占卜)이다.” 자연의 변화에 관련된 천문이 거북이 등껍질이나 짐승의 뼈에 글자를 새겨 복사되어져 있는 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에 대한 정확한 기원을 알 수 없지만, 복사에 기록된 내용들은 간지의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들이며, “간지(干支)라는 명칭은 후한(後漢) 때 왕충의(典據)에 따른 신화적 기원과 실제로 간지의 사용이 확인된 역사적 기원으로 구분할 수 있다. ”
▶역사적(歷史的) 기원
은(殷)왕조는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의 소둔촌(小屯村)을 말하는데, 실제로 존재했다고 여겨지는 최초의 중국 왕조이다. 은나라 의 역사는 사마천의 「은본기(殷本紀)」에 기술되어 있었으나, 대다수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그 실체를 믿지 못하였다. 그러나 1899년 갑골문이 출토된 이후, 오랜 연구를 통하여 은나라는 기원전 1,600년경부터 기원전 1,046년까지 실재한 나라로서 그 실체가 규명되었다. 갑골문은 거북의 복갑(腹甲)과 소의 어깨뼈 골(骨)에 새긴 문자로서, 그간 십만편 정도가 수집되어 1,700여자 정도가 해석되었다.
해석된 갑골문의 내용으로는 점복(占卜)을 행한 복사(卜辭)를 새긴 것이 대부분이고 그 외에 간지표(干支表)를 기록한 것이나 구갑(龜甲)의 공물 헌상과 소장현황, 기사각사(記事刻辭)등이 있다. 또한 갑골문 연구를 통해 은대에는 육십갑자간지(六十甲子干支)를 역일(曆日)로 사용하고, 왕명(王名)에는 천간을 사용하였음이 밝혀졌다. 반경(盤庚)이 박읍(亳邑)을 정돈하고 옮긴 마지막 도읍이 은(殷)이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간지의 역사적 기원은 은대(殷代)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 왕명(王名)에 천간 사용
은(殷)나라 왕명(王名)에는 모두 천간이 사용되었다.
사마천의 《사기》「은본기(殷本紀)」에 의하면 은나라는 설(契)-소명(昭明)-상토(相土)-창약(昌若)-조어(曹圉)-명(冥)-진(振)-미(微)-보정(報丁)-보을(報乙)-보병(報丙)-주임(主 壬)-주계(主癸)의 제후를 거쳐, 천을(天乙)인 탕왕(湯王)에 이르러서는 제후를 정벌하고 삭(朔)을 바로잡고 복색을 바꿔 조회를 하는 등, 국가로서 면모를 갖추었다. 또한 천을(天乙)에 이어
외병(外丙)-중임(中壬)-태갑(太甲)-옥정(沃丁)-태경(太庚)-소갑(小甲)-옹기(擁己)-태무(太戊)-중정(中丁)-외임(外壬)-하단갑(河亶甲)-조을(祖乙)-조신(祖辛)-옥갑(沃甲)-조정(祖丁)-남경(南庚)-양갑(陽甲)-반경(盤庚)-소신(小辛)-소을(小乙)-무정(武丁)-조경(祖庚)-조갑(祖甲)-늠신(廩辛)-경정(庚丁)-무을(武乙)-태정(太丁)-제을(帝乙)-제신(帝辛)
이 왕으로 재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은대에는 제후 상태에서도 보정(報丁)으로부터 이름에 천간을 사용하였으며, 공식적인 왕조로서 실체를 갖춘 이후에는 30 명의 왕의 이름에 천간을 사용하였다. 또한 천을(天乙)의 태자(太子)인 태정(太丁)은 왕이 되지 못하고 죽었지만, 이름에는 천간(天干)이 들어 있었고, 마지막 왕인 제신(帝辛)의 아들 무경(武庚) 역시 왕이 되지 못하고 주(周)로부터 녹부(祿父)로 봉해져 은(殷)의 제사를 지냈으나 이름에는 천간(天干)이 사용되었다. 이에 반해 제신(帝辛)에게 폭정(暴政)과 음행(淫行)의 중단을 간청하였던 미자(微子), 비간(比干), 기자(箕子) 등의 이름에는 천간이 사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은나라는 왕 또는 왕이 될 사람의 이름에 천간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은대의 선공과 선왕의 명칭에 모두 십간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선공과 선왕의 이름에 십간을 붙이게 된 연유에 대해서 는 태어난 날의 십간을 따랐다는 생일설(生日說), 죽은 날의 십간을 따랐다는 사일설(死日說), 죽은 후의 간지(干支)를 따랐다는 추명설(追名說) 등이 있으나, 어떤 설(說)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은대에 선공과 선왕의 이름에만 십간이 사용되었고 선공과 선왕의 제사는 모두 그 이름의 천간에 해당하는 날에 지냈으며, 이는 은대의 왕들도 다른 고대왕들처럼 제사장으로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에 비춰 십간은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이어주는 신성성의 징표로서 사용됐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제정일치적(祭政一致的) 성격이 강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 역일(曆日)에 육십갑자(六十甲子) 사용
육십갑자(六十甲子)는 역일(曆日)에 일상적으로 사용했던 주기(週期) 이름이다.
은나라 지반(地盤)의 발견으로 은나라의 실체가 세상에 드러난 이래, 갑골문은 많은 학자들의 연구를 거쳐 그 자형과 의미가 복원되었다. 최초로 갑골문을 발견하고 수집한 사람은 저명한 금석학자인 왕의영(王懿 榮)이었다. 그리고 이후에 나진옥(羅振玉), 왕국유(王國維), 곽말약(郭沫 若), 동박빈(董作賓) 등의 연구를 거쳐 갑골문의 자전(字典)이 편찬되기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약 10만편의 갑골문 중에서 중복되지 않는 낱글자는 4,500-4,600여개 정도이고, 이 중에서 학자들에 의해 판독 된 글자는 1700여개이며, 그 중에 음과 의미가 거의 확실하여 「설문(說文)」에 수록된 글자는 약 1,000여개이다.
갑골문에 대한 최초의 연구는 낱자 하나하나를 고석(考釋)하는 데서 출발하였는데, 점복(占卜)을 행한 날짜가 모두 간지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빨리 고석된 글자가 천간자 10개와 지지자 12개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갑골문 연구를 통하여 은대에 간지가 두루 사용되었음이 밝혀졌다.
갑골에 복사(卜辭)한 날을 표시하는데 있어서 갑신복(甲申 卜)·계미복(癸未卜)과 같은 식으로 간지를 사용하였고, 육십갑자 간지표(干支表)를 새긴 갑골도 여러개 발견되었다. 육십갑자 간지표는 가로로도 쓰여 있고 세로로도 쓰여 있으며, 6행 간지표를 쓴 것도 있고 반만 쓴 것도 있었다. 이들 간지표가 기재된 갑골의 발견으로 인하여 은대(殷代)에는 오늘날과 같은 형태와 순서의 육십갑자를 역일(曆日)로 사용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은대에는 10일을 하나의 순(旬)으로 하여 매 순의 첫째 날은 갑일(甲日), 마지막 날은 계일(癸日)로 삼아서, 다가오는 열흘 동안의 안위와 길흉을 점쳤던 복사(卜辭)가 다수 발견되었다. 또한 당시의 복사를 보면 날짜도 역일(曆日)에 따라 육십갑자 간지로 정확히 표기하였다.
이들 갑골 복사에 나타난 역일 개념을 살펴보면, 계미일(癸未日)로부터 3일째 되는 역일은 을유일(乙酉日)이라 하였고, 계유일(癸酉日)로부터 5일째 되는 역일은 정축일(丁丑日)이라 하였다. 또한 계미일(癸未日)로부터 6일째 되는 역일은 무자일(戊子日)이라 하였고, 경자일(庚子日)의 다음날은 신축일(辛 丑日)이라고 하여 오늘날의 육십갑자 차서(次序)와 일치한다. 이를 통해 볼 때 은대에는 이미 오늘날과 같은 육십갑자를 역일로 사용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처럼 은대에 이미 십간과 십이지가 상합(相合)된 육십갑자로 날짜를 표시하고 역일을 계산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지지(地支)는 적어도 그 이전에 창안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맹세개(孟世凱)는 이와 같은 간지상배기일법(干支相配紀日法)이 하대(夏代)에서 만들어 진 것으로 보았다. 다만, 은대에는 간지가 하루하루의 명칭이었고, 햇수를 갑자(甲子)로 표기하기 시작한 것은 동한(東漢) 때의 일로, 훨씬 후대의 일이다. 물론 간지는 대부분이 문자의 원형(原形)과는 관련이 없이 음(音)만 빌린 이른바 가차(假借)인데, 주목해야 할 사실은 갑골문에 보이는 간지자는 이미 모두 가차되어 사용된 것이다. 이는 갑골문 이전 시기에 이미 간지자가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는데, 각기 다른 60간지를 가지고 있다. 아직도 판독(判讀)하지 못한 갑골문이 많이 남아있다. 세밀(細密)하게 판독하고 분석(分析)하여 내용의 신빙성(信憑性)을 높여야 한다
◎ 지지의 기록
지지의 문헌상 최초의 기록은 회남자(淮南子)에 등장한다.
“맹춘은 초봄이다. 이달에는 초요*가 인寅을 가리키고...”
“중춘의 달에는 초요는 묘卯를 가리키고...”
* 초요(招搖) : 북두칠성의 자루방향, 동방 별자리 28수의 저수(氐宿)에 속하는 것
출처 : 회남자(淮南子)
BC2세기 무렵 유방의 손자 유안(회남왕)이 회남지방을 다스릴 때 논객들 3000명을 모아 제자백가의 이론을 총 망라한 책으로 당시의 사상과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서적이다.
<출처>
2017년.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미래예측학과 명리학전공 김종훈 석사논문 「陰陽五行과 天干地支의 聯關性에 관한 考察」
현묘 「나의 사주명리」